미덕학원 설립… 인생2막 교육자의 삶
◆ 관광공사 총재 재임, 돋보인 활약
국제관광공사 총재로서 안동준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파주 임진면 장산리에 전망대과 승공전시관을 건립하고 반도아케이드에 외국인 전용 한식점을 개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또 1971년 12월 워커힐에 한꺼번에 2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유스호스텔을 개관했다.
관광진흥 사업은 1972년 들어 더욱 활발히 추진됐는데, 안동준이 주력한 과제는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관광산업을 수출업으로 지정하는 것과 관광기금 조성, 외국인 관광객 확대 유치 등이었다. 그는 민간자본 4억, 정부융자 40억, 차관 80억 등 124억으로 관광기금을 마련할 것과 경주 부여 제주 등 10개 지역에 민간의 투자 개발을 제도화시켜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또한 워커힐을 특수유흥단지로 지정해 2~30개로 분할 매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정부의 최종 방침이 결정되지 않아 1972년 5월 9일 열린 국제관광공사 주주총회에서 무기 연기됐다.
외국인 관광객 유치는 33만명이 목표였다. 안동준은 관광 진흥의 묘책으로 한국의 토속미와 생활 풍경을 제시했다.
또 외국 관광객들에게 종합적인 관광 안내를 제공하기 위해 추풍령관광안내소를 개설하고 일본어와 영어 안내원을 고정 배치했다.
이 외에도 관광백과를 간행하고 동남아 관광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정력적으로 업무에 매진한 결과 국제관광공사 운영은 호조를 보였다. 1971년과 1972년 1/4기 영업 이익이 모두 흑자를 기록했고 1972년 4월 관광사업진흥촉진대회에서 국제관광공사는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 정치적 배경에 구속되는 시련도
그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만성적자이던 관광공사를 흑자로 돌려 놓았음에도 삶의 불운은 뒤따랐다. 3개월 뒤인 1972년 7월 19일 안동준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및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된 것이다.
구체적인 혐의 내용은 2월 초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태평양지역관광협회(PATA) 21차 총회에 참석하면서 부하 직원들로부터 1100 달러를 여비조로 받아쓰고, 직원들의 퇴직보험 대가로 동방생명으로부터 552만원의 커미션을 받아 사우회비로 유용했으며, 기밀비에서도 수십만원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등 1000여만원을 불법 유용했다는 것이었다.
모종의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안동준은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하루만에 구속됐고 구속과 동시에 사표를 제출했다.
구속 후 안동준은 서울형사지법에 구속적부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법원의 석방 결정에 따라 일주일만에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동우회의 곽상훈, 백낙준, 이재학 등 22명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1973년 6월 26일 법원은 안동준에게 징역 1년에 추징금 57만원을 선고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5년 5월 31일 열린 항고심 공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국제관광공사 총재직에서 물러난 안동준은 정치에 대한 허망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소임이 또 다른 곳에 있음을 느끼게 됐다.
◆ 인생 2막, 미덕학원 이사장
그는 충주미덕학원 이사장으로서 학원 일을 돌보는 한편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소수서원재산관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서울국제개발주식회사 이사에 선임됐다. 평소 관심이 있던 역사 연구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서예에도 열심이었다. 이제 만 53세가 된 안동준에게 정계 은퇴는 오히려 ‘인생의 2막’이었다.
안동준이 충주미덕학원을 설립한 것은 6대 의원 시절인 1965년이었다.
해방 후 고향 마을에 이담국민학교를 세우는 등 일찍부터 교육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그는 전답과 임야, 가실 등 물려받은 재산을 쾌척해 충주에 학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66년 미덕여자중학교를 개교했다.
미덕여자중학교는 지방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곧 남녀공학인 미덕중학교로 개편됐고, 3년 뒤에는 충주상업고등학교, 1978년에는 미덕유치원을 설립했다.
학원과 별개로 1966년부터 미덕도서관을 개관해 1970년 초까지 운영했는데 주로 충주 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이 이용했다.
1992년에는 아들인 안건일의 주도 아래 중산외국어고등학교(현 중산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밖에 1995년 전문대학 건립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학원 설립 후 안동준은 평이사로서 1년에 한 번 정도 이사회에 참석할 뿐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다가 1968년 3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가 학원 일에 관여하지 않았던 것은, 사학의 공공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학원을 운영하면서 그가 견지하고자 하는 중요한 신조였다.
그는 사학 역시 공립학교와 같이 운영돼야 하며 다만 적자를 충당하는 것만이 자신의 의무라고 여겼다. 1978년에는 한국사학재단연합회 부회장에 선임됐고, 1983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5주년을 맞아 교육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는 1981~85년 약 5년 간을 제외하고 2004년까지 이사장으로서 충주미덕학원을 지켰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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