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의 철학 담긴 ‘증평 협업이상촌’

▲ 1991년 10월 17일 미덕학원서 연설하고 있는 안동준. 1948년 이담공립국민학교를 세우면서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나라의 동량으로 키우겠다는 그의 꿈은 1965년 미덕학원을 설립하며 완성됐다.

◆ 증평 증천동에 설립한 농업공동체
안동준이 견지한 사상은 보수주의였다. 그럼에도 그가 실행한 일을 보면 매우 진취적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증평 협업농장’이 그것이었다.
‘증평 협업이상촌’으로도 명명된 협업농장은 그이 이상이 담긴 프로젝트였다. 농업・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던 안동준이 7대 국회의원 시절인 1968년 괴산군 증평읍 증천동에 설립한 일종의 농업 공동체가 그것이었다.
이 같은 공동체를 세운 계기에는 그가 1965년 이스라엘 농촌을 시찰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그가 저술한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에서도 한 장을 할애해 키부츠와 함께 모샤브에 대해 설명했다. 모샤브는 이스라엘의 농업 공동체로 키부츠와 달리 토지 사유를 인정하는데, 그 같은 농업 공동체를 통해 이상향을 세우고자 했던 의지가 엿보인다.
특히 농업 공동체 운영과 관련해 보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일본의 야마기시즘으로 여겨진다.
야마기시즘은 1953년 일본의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巳代藏‧1901~1961년)가 제창한 공동체 운동이다. 야마기시는 전쟁이 끝나고 친환경 양계와 농사법을 개발했는데 이를 배우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야마기시가 꿈꾸어 온 이상사회의 철학에 공감한 이들이 1953년 교토(京都)에서 야마기시회(山岸會)를 발족했다.
야마기시회의 취지는 ‘자연과 인위의 조화를 도모해 풍부한 물자와 건강, 친애의 정으로 가득 찬 안정되고 쾌적한 사회를 인류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58년 처음으로 미에현(三重縣) 가스가야마(春日山)에 그 이상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세웠다.
야마기시즘은 1966년 수원 황계동의 농민교육원에서 야마기시즘 특강을 함으로써 한국에 소개되었고, 1984년 만들어진 화성시 구문천리에 있는 산안마을이 최초의 야마기시즘 공동체라고 알려져 있다.
야마기시즘은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와 개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조화로운 인간 관계’와 ‘물질적 평등’을 바탕으로 한 사회를 지향한다.
인간의 본성을 ‘선(善)’으로 보고, 서로 신뢰하고 협력하면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살 수 있다고 믿는데, 경쟁보다는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핵심이다.

◆ ‘협업농장’, 현재까지 존속
안동준 또한 ‘증평 협업이상촌’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동준은 1968년 야마기시즘에 입각한 협업이상촌을 증평에서 시도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합숙훈련소를 세우고 농촌 청년들을 선발해 연 5회에 걸쳐 협업이상촌에 대한 연찬회를 실시했다. 그리고 1969년 3월 25일 연수자 가운데 5명을 선발해 역시 사재로 전답 약 2만 평과 하천부지, 황무지 등 약 2만 평을 확보해 입주시켰다.
협업이상촌은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제59호로 책정됐고 경영은 협업을 통한 민주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순수익은 사업준비금 50%, 적립금 20%, 교육기금 20%, 후생기금 10%로 배분했는데 이 가운데 사업준비금은 노동력과 출자에 따라 구성원 개개인에게 분배하도록 돼 있었다.
구성원은 1979년 말 기준 9가구 51명이고, 1975년 호당 평균 소득을 보면 발족 당시에 비해 약 14배 증가했다. 증평협업이상촌은 1992년 농업법인 증평영농조합으로 등록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중산 주도로 국회의원동우회 창립
7대 국회 때 사실상 안동준이 주도해서 만든 단체가 국회의원동우회였다. 이 단체는 1968년 7월 17일 창립됐다.
안동준은 그보다 앞서 1968년 4월 국회의원상조연금법안을 준비하는 등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법안은 결국 제출하지 못했지만 친목과 상호부조를 위한 단체 결성은 성과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운영위원에 선출됐다.
안동준은 전현직의원 서도 모임을 결성하고 서예전을 개최하는 등 동우회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78년에는 부회장에 선출됐고 1983~1986년 상근 부회장을 지냈다.
1986년에는 기관지 ‘정우’의 편집위원으로 선임됐다. 국회의원동우회는 1989년 대한민국헌정회로 명칭을 변경해 지금까지도 그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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