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정치가, 교육가로 평생 헌신한 ‘큰 산’
필자가 중산 안동준 선생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1973년이었다.
그때 중산 선생은 9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괴산 연풍 장터에서 벌였던 선생의 열정적인 사자후를 보며 정치라는 것과 유세라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카랑카랑하고 격정적인 목소리, 50년 세월을 넘은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4선 의원이었음에도 ‘정치적 배경’에 휩쓸려 1973년과 1978년, 그는 9대와 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20% 미만의 득표율에 그쳤다.
어렸을 적 선친께서 말씀하셨었던 기억이 있다.
“괴산에 큰 인물 두 분이 계시지. 한 분은 벽초 홍명희 선생, 두 번째는 중산 안동준 선생.”
군문(軍門)에 들어 대한민국 강군의 초석을 놓고, 4선 중진 의원으로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미덕학원을 세워 나라의 동량을 키워낸 교육자의 길을 걸었으며, 한민족 역사의 뿌리를 찾아 역사가로서 소임을 다했고, 특히 초서에 능한 서예가로 명망이 높았던 선생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는 일은 큰 영광이었다.
잠시 폭염을 긋은 소나기가 장하게 내리던 여름 어느 날, 중산 선생의 유업을 이어 미덕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중산의 아들 안건일 선생을 만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아들로서 기억하는 부친 중산 선생은 어떤 모습이었나.
아버진 늘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 당신께서 중요하게 여긴 건 가정보다 국가와 사회였다. 일본서 주오대를 다니다 방학 때 오시면, 어렸던 나는 부친을 ‘큰 아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이가 집에 왔으니 그랬나 보다. 귀국해서도 집에는 없고, 늘 공회당에서 야학을 하거나 제방을 쌓거나 하는 일로 바빴다. 서울에서 학병단을 조직해 운영하셨는데, 좌우 대립으로 장충단 총격전까지 벌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1949년 봄, 결국 조부께선 부친을 강제로 고향으로 ‘끌고 오는’ 일까지 생겼다.
- 안 이사장님 성장기의 가장 풍경은.
열 세 살 때까지 조부님과 살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서울로 이사와 살았다. 부친께선 새벽 5시 30분이면 바깥으로 나가 밤 12시가 돼서야 귀가하시곤 했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당신이 했던 일은 나랏일이었다. 빛과 그림자, 그만큼 가정은 소홀했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니 아버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없다. 그 당시 국회의원은 지금과 달랐다. 들어오는 돈은 적은데 찾아오는 손님은 엄청 많았다. 매일 50~60명 가량 찾아오셨던 것 같다. 손님이 많다보니 신발 잃어버리는 이들도 두 세명 나오곤 했다. 경제적 관념이 없으신 분이셨다. 그 뒤치다꺼리로 고생하신 건 어머니였다. 그 고생 어찌 헤아릴까 싶다. 그러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 그런 중산 선생의 삶을 이해하게 된 계기는.
1961년 하와이로 떠났다. 하와이대에서 공부할 때 부친께서 두 번 오셨다. 그때 아버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처음있는 일이었고, 당신의 삶이 참 힘드셨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국가와 민족의 일에만 열심이고, 가정에는 소홀했던 아버님의 ‘과오’에 대해 이해하게 된 시점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그때 하와이에 망명하고 있을 때였는데, 오중정 총영사와 함께 병문안을 가게 됐다. 프란체스카 여사도 함께 있었다. 그 기억이 새롭다. 메인대 교수로 재직할 때 한 달 여 부친과 같이 있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부친께선 우편엽서 2000장을 사셨는데, 당신의 지인들에게 일일이 손수 공들여 글을 써서 보내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꼼꼼하고 철두철미하고 엄청난 노력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경외감이 들었다. 한국 정치에서 상처도 많이 입으신 분이다. 정치적 배경이 있었다면 더 큰 일들을 해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 재야 역사학자로서의 중산은 어떤 분인가.
한국 고대사에 심취해 1주일에 한 번 문화강좌를 하셨다. 특히 강조하신 부분이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였다. 한국은 세계 어느 곳보다 인류사랑, 박애정신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변하면 지구촌 특등국가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파싸움은 심하고 지역과 종교 등의 갈등이 거칠었다. 단합해서 노력하면 세계를 이끄는 국가와 국민이 될 것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국조전을 건립하게 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국민 전체의 단합을 우리 민족의 뿌리로부터 시작하려는 시도였다. 재산을 털어 옛날 우리 과수원에 ‘원구지원(圓丘之怨)’을 지었다. 현재 매년 개천절 행사를 열고 하계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 어머님의 고생이 많았다고 하시던데.
부친께선 손님이 찾아오면 박카스 한 병이라도 주셨고, 여비 몇 푼이라도 챙겨 보냈다. 그냥 가시게 하는 분이 없었다. 당신은 늘 검소하게 사시면서도 그게 시골인심이라고 여기신 분이었다. 경제적 관념은 없는 분이셨다. 그러니 집안은 거덜날 수밖에 없었다. 37번이나 이사를 갔으니, 어머니께서 그 고생 어찌 감당했을까 쉽게 짐작되지 않겠는가. 부친께서 낙선하신 후 빵집 2칸에서 살기도 했다. 내가 미국 가기 전 편하게 발이라도 뻗고 자라고 이완용이 썼던 사랑채 방 하나를 빌려서 쓰도록 했는데, 그때 전 재산이 전화기 한 대였다. 부친은 그걸 팔아서 내 비행기표를 사고 여분으로 120불을 주셨다. 그리고 당신은 백화산에 있는 흰드뫼로 가셨던 걸로 기억한다.
- 중산 선생의 성품은 어떠하셨나.
강직한 분, 무서운 분, 외유내강의 성격이셨다. 부친께선 단 한 번도 이래라저래라 하시질 않았다. 그것이 내게는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경복고 시절 정구선수로 활약했을 때에도 칭찬 한마디 없으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마치고 교수 생활을 할 때 찾아오셔서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때 느꼈다. 아, 아버님도 늘 나를 응원하고 지켜주셨던 거였구나.
- 중산 선생께선 서예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는데.
조부께선 가난한 농군이셨다. 왕골을 베껴 좁게 썬 뒤 그걸 말려 상주가 절할 때 쓰는 깔개를 만들어 돈을 모으셨다. 그걸 팔아 땅을 샀다. 집이 가난한 까닭에 공부는 엄두도 못냈다. 한문을 독학으로 익히셨는데, 산에 나무를 하러갈 때도 남에게 빌린 책을 가지고 가서 틈틈이 익히셨다. 그리고 조부께선 훈장을 하셨다. 그런 조부님으로부터 아버님은 서예에 대한 훈련을 받으셨다. 엄한 것이었다. 그 교육 덕분일 것이다. 선친의 글이 해서(楷書)는 충북최고, 초서(草書)는 한국 최고셨다고들 말한다. 1000여점의 작품이 남아있다.
- 아들이 평가하는 부친 중산은 어떤 분인가.
5분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분이셨다. 그만큼 부지런하셨다. 평범한 사람 ‘7인분’을 살다가신 분이다. 그 부지런함이 많은 일들을 일구는 동력이 됐다. 군인으로, 정치가로, 교육가로, 재야사학자로, 서예가로, 사상가로, 철학자로 참 많은 일들을 하셨다. 그러면서도 한편 아쉬움으로 남는 건, 선친께서 ‘때’와 ‘사람’을 더 잘 만났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더 좋은 일, 더 큰일을 하셨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 안건일 충주미덕학원 이사장
안건일 이사장은 1942년 5월 11일 충북 괴산에서 중산 안동준 선생과 조향련씨 사이 장남으로 태어났다. 괴산 명덕초를 졸업하고, 서울 경복중, 경복고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를 졸업한 뒤 미국 조지아대 대학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 조지아대 정치학 강사, 1976년 메인대 교수로 재직했다.
1985년 충주미덕학원 이사, 1992년 중산외고 교장, 2009년 충주미덕학원 이사장에 취임해 현재까지 직을 맡고 있다. 배우자 이유경(미덕학원 기획본부장)씨 사이 장남 안광선씨를 두고 있다.
2003년 사학육성공로상 봉황장, 2004년 옥조군정훈장, 2023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미국행정학회, 한국정치학회, 한국사립중‧고법인협의회, 세계교장연합회 등에 소속돼 있다.
좌우명은 ‘자강불식(自强不息)’, 골프를 즐겨하며 애장품으로 1만5700여권의 책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