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균열과 분단의 상처를 ‘낮은 숨’으로 기록하다

최태식 시인
최태식 시인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시대, 최태식 시인이 멈춰 서서 바라보는 문명의 그림자를 시로 기록했다.

도서출판 상상인에서 펴낸 시집 아무 일 없는 듯은 일상의 사물과 지명을 통해 현대문명과 분단, 인간 내면의 상흔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집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표면 아래에는 시대의 비명과 균열이 흐른다. 수건·깡통·침목·DMZ·폐사지·오두산 등은 이 시집의 주요 장치이자 기호로, 시인은 그것들을 통해 효율의 그늘 속에 숨겨진 결핍과 폭력을 드러낸다.

수건 접기에서는 사랑을 형식이 아닌 소모의 물성으로, 1,435밀리에서는 표준궤도의 레일을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 형상화하며 문명의 역설을 꼬집는다.

분단의 현실 또한 시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함수지대DMZ에서는 새를 나눌 수 없으니 땅을 나누었다는 문장으로, 오두산에서는 아무 일 없는 듯한 오늘이 사실은 상흔의 연속임을 환기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결론은 절망이 아니다. 스며든다는 것에서 시인은 먹물이 흰 종이에 번지듯 / 살며시 / 당신에게라는 구절로 체류와 공명, 나눔의 윤리를 제시한다. 파괴와 속도의 시대 속에서도 스며듦의 감각으로 인간의 존엄을 복원하자는 메시지다.

문학평론가 김우종은 추천사에서 늦깎이 시인이지만 언어예술의 실험성과 사회적 성찰을 동시에 이룬 시인이라며, “우리 모두의 사랑과 평화를 위한 예술을 실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황정산 시인은 이 시집은 선언문이 아닌 비망록이라며 생활과 역사, 문명의 균열을 낮은 숨으로 증언한다고 평했다.

아무 일 없는 듯은 거대한 선언 대신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달려온 시대의 폐부를 어루만진다.

시인은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고요의 땅 위에서, 아무 일 없는 듯 오늘을 기록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도복희 기자 phusys2008@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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