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옥 수필가

▲ 정상옥 수필가

가을 들녘은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묵정밭 둔덕에 잡초들과 어우러져 피어난 망초꽃 무리가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이는 모습이 가히 환상이다. 고요한 빛을 품은 망초꽃은 그저 잡초 같지만, 작고 여린 가지로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견딤의 상징이다.
망초 꽃밭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몇 년 전 이맘때 일이 떠올라 빙긋이 웃음이 나온다.
그날도 휴일을 맞아 교외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얀 망초꽃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들꽃을 좋아하는 내가 그곳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어 남편에게 차를 좀 세우라고 부탁했다. 하얀 꽃 무리 속에 붉은빛을 요염하게 발하고 있는 몇 송이 색다른 꽃이 눈에 들어왔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힐끗 쳐다보고는 앞을 향해 냅다 달리는 것이 아닌가.
저만큼 멀어져 간 꽃밭을 향해 몸을 돌리며 왜 차를 세우지 않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운전대만 잡으면 시간에 꼭 맞춰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직진만 하는 남편의 운전 습관이 못마땅하던 차에 그날따라 참아왔던 부아가 치밀었다.
작은 풀꽃 한 송이 앞에서도 가슴 설레는 아내의 감성에 애틋한 동조는 못 할망정 잠깐 차를 세워 꽃을 보고 가자는 청을 무시하는 매정한 의도가 뭐냐고 다그쳤다. 달리는 차 속도만큼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며 동상이몽 하는 남편과의 나들이 동행을 진정 후회했다.
심연 깊은 곳에서 침잠돼 있던 불만들이 스멀스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결국 날이 퍼렇게 선 언쟁으로까지 치닫고 말았다.
교외로 나올 때마다 허접한 들풀 따위에 발목을 잡혀 시간을 허비하는 내 감정이 나이에 맞지 않는 주접이라 평했고, 허접한 목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운전 근성에 발맞춰 가느라 얼마나 숨이 가빴는지를 조목조목 들추며 날을 세웠다. 한참을 서로의 자존심에 난도질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싸움의 발단이 된 망초 꽃밭이 환하게 다가와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꽃밭에 또다시 가슴이 두근댔지만, 나잇값을 못하는 주접을 그 앞에서 다시는 떨지 않으리라 눈을 돌리는데 남편은 슬며시 꽃밭 옆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망초꽃 사이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나오더니 내게 한 움큼의 꽃을 내밀었다. 설핏 돌아보니 하얀 망초 꽃다발 속에는 아까 궁금해 하던 붉은 꽃 몇 송이도 들어있었다.
“자, 받아. 그렇게 궁금해하던 코망초.”
붉은 꽃은 분명 코스모스였다. 역시 그 흔한 꽃 이름 하나 모르는 숙맥이라며 면박을 줄까 하다 불쑥 내민 꽃다발 속에서 코스모스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것 같아 입을 닫았다. 아니 조금 전까지 부글대던 속내와는 달리 손이 먼저 가 꽃다발을 덥석 움켜쥐는 건 무슨 주접인지.
“망초꽃 가득한 곳에서 색이 다른 몇 송이 꽃이 섞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네. 색깔이 다른 꽃들이 조화를 이뤄가는 것이 자연이듯 서로 다른 성격과 감성이지만 서로에게 길들어지며 세월 속에서 익어가는 것이 부부여, 이 사람아. “
서정에는 목석이라 타박하며 옹졸하게 뒤틀려 있던 마음이 금세 하늘거리는 망초 꽃밭처럼 느슨해졌다.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제각각의 풀꽃들이 어우러져 꽃밭을 만들듯이 너와 내가 자주 삐거덕거려도 우리가 되어 인생의 꽃밭을 가꿔가는 것이 부부구나.
각양각색의 꽃들이 서로 밀어내지 않고 피어있는 그날의 들녘처럼 우리도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들꽃처럼 어우러져 소박한 망초꽃처럼 살고 있다. 때로는 바람이 스쳐 가며 흔들어도 우리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피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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