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시인

▲ 김혜경 시인

좌구산은 앉아 있는 거북이 형상이란다. 물론 서 있는 거북이는 본 적이 없으니, 거북이는 모두 앉아 있거나 엎드려 있을 것이다. 그냥 거북산이라고 했다면 조금 생동감을 느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자는 거북의 등을 타고 올라간다. 오전까지 내린 폭우에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이 고요하다. 그 고요가 더 마음에 들었다.

증평 좌구산은 한남금북정맥의 최고봉이다. 행복과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가 앉아 있는 형상은 이름처럼 휴양에 적합하다. 휴양시설과 구름다리, 천문대가 있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근처의 삼기저수지의 안개와 좌구산의 운치는 동양화풍의 궁합을 이룬다.

오르고 올라도 사람은커녕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고요 속에는 맑은 향기가 들어 있다. 그 향기를 따라 나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나오는 문을 찾지 못하여 헤매고 있다. 아침까지 내린 비가 모든 소리를 지우고 갔을 것이다. 비는 후둑거리며 나뭇잎에, 꽃잎에, 지붕에 떨어지며 분주한 소요를 일으켰을 것이다.

요란한 것은 사라지면서 더 큰 적막을 남겨두고 간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인지도 모른다. 요란한 소요에 더 강력한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산의 중턱은 쉬어가는 곳이다. 가쁜 숨을 내려놓고 거친 호흡을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극강의 고요함은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이 산속에 나 혼자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하면 등골이 오싹하여 쉴 수가 없다.

평소의 내 일상은 적당한 소음에 길들어 있다.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노랫소리가 들리고 적당히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려야 평안을 느낀다. 상수리 열매 하나가 툭 떨어지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깊은 고요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고 보니 고요가 나를 반긴다는 생각보다는 고요의 덫에 걸렸다는 느낌이다.

대학 1학년 때 날이 저문 후에 속리산 중턱에 있는 산장을 찾아가야 했던 적이 있었다. 동아리 부원들은 미리 떠났고 선배와 나는 체육대회를 마치고 늦게 출발을 했다. 선배의 옷자락을 붙들고 암흑의 산길을 올라가는 것은 마귀의 옷자락에 휘감긴 것 같은 공포였다. 적막한 그 산중에서 나는 나무의 숨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무슨 소리가 들렸건 그것은 다른 소리가 아니라 나무의 숨소리여야만 했다. 울울창창 서 있는 나무들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내 곁에서 숨 쉬고 떠드는 존재라고 여기고 싶었다.

불현듯 그때의 두려움이 밀려오자 이곳의 나무들도 숨소리를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뱉어 놓은 이산화 탄소를 나무들은 귀하게 끌어갔을 것이다. 비 오는 동안 길어둔 뿌리의 물을 신속히 잎으로 올려 탄수화물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단지 산소를 내뿜고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들리는 소리만 들어야 한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귀신의 감각이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산을 오른다. 여전히 침묵은 계속되고 있지만, 나무가 숨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우겨 본다. 그러자 침묵의 산이 갑자기 시끄러워지는 것이다. 오리나무 박달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 저마다의 호흡으로 숨을 쉰다. 채 꽃을 떨구지 못한 수국도 제 색깔로 울고 웃는다. 기상대로 향하는 길목에선 별이 수군거린다. 며칠째 구름에 가려 얼굴도 내놓지 못했다고 투덜거리고 있다.

고요는 인간의 주파수에 따라 붙여진 단어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처럼, 내가 듣지 못하면 아무런 소리가 없는 고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고요는 결코 아무런 소리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요 속의 소요를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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