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그해 겨울(1967년), 유리창 바깥으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랬다. 졸업식 노랴 합창의 와중에도 때까치 몇 마리 날개를 퍼덕이는데.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그 대목은 사실이었다. 졸업식 행사는 지겨웠지만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처럼 졸업은 슬픈 것이었다. 여자들은 벌써부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해마다 졸업식이 끝나면 여자들은 부둥켜안고 그리도 슬프게 꺼이꺼이 울었다. 우선 헤어짐이 슬펐다. 그리고 봄이 오면 마늘밭에서 호미를 잡거나 도시 모퉁이 공장 근로자나 식모살이로 뿔뿔이 흩어지는 그네들의 앞날이 서러웠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복제 선생님은 끄떡끄떡 졸고 있었다. 아무도 석연화가 왜 답사를 읽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렇게 행사가 무사히 끝났다.
교장 선생님과 기관장들은 코트 자락 치렁대며 소재지 요릿집으로 우수수 몰려갔다. 평교사 선생님들은 교무실 난롯가에 모여 오징어 다리 뜯으며 운동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우리들은 또 운동장에 모여 쭈삣거렸다. 유일하게 꽃다발을 받은 정덕구가 철봉대 앞에서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사진기 포즈를 취했고 나머지 졸업생들은 발을 총총거리며 구경에 빠졌다. 칼바람 불면서 그림자도 추운지 오소소 떨었다.
그날 하굣길 저물녘 논두렁길이 꽁꽁 얼었다. 저녁놀이 번지는 백화산 앞에서 키 큰 그림자 하나가 우울히 흔들리고 있었다. 도승방 선생님이었다. 웬일일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두 손을 꼬옥 쥐고 어린애처럼 콧물을 줄줄 흘렸다.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데.
“석연화가 기어이 졸업식에 안 나왔더라. 가난한 여자애라고 학교에서 도지사상 안 줬다고 안 나와 버린 거여. 공부허먼 반드시 길이 있을 거라고 내가 격려는 했는데…… 걔네 아부지가 노름판에 빠져 그나마 다랑이 전답을 또 날렸으니.”
선생님은 코를 피잉 풀더니 고무신 밑창으로 북북 비벼버렸다. 그러다가 잠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여기 편지.”
꼼꼼하게 접힌 종이조각 하나를 건네주었다.
“앞이 안 보여.”
뭐가 안 보인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선생님의 숨소리가 자꾸 거칠어지는데 대보름 달빛만 혼자 휑하니 밝았을 뿐이다. 꾸깃꾸깃한 종이에 진한 연필심으로 또박또박 쓴 글씨다. 설핏 잔가지 사이로 둥두렷이 떠오른 연화의 얼굴 옆으로 연필 도막 하나가 또렷이 걸려있었다.
선생님.
열심히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지요. 노력하면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저는 2년 반 동안 두 번 빼놓고 모두 1등을 했습니다. 박철배와 정덕구가 1등 한 것은 한 번씩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도지사상은 제가 타야 합니다. 저는 철배나 덕구보다 공부를 잘합니다. 앞으로 공부는 제 인생에서 끝이 났지만 졸업만큼은 1등으로 마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바르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1등 할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래요. 제가 만약 중학교에 들어갈 수만 있었더라면 마지막 1등도 빼앗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는 졸업식은 나갈 수가 없습니다.
1967년 2월 14일 나쁜 아이 석연화 올림
그날 밤 연화가 개울 건너 우리 집까지 밤마실 왔다. 겨울 달빛이 툇마루 주전자 뚜껑을 비벼대고 있었다. 웬일일까. 달빛을 허옇게 뒤집어쓴 채 방싯방싯 웃으며 나타났다. 다음주에 서울 당구장 하는 집으로 식모살이 간다며 손수건을 풀었다 삶은 달걀 다섯 개였다. 껍질을 벗기자 연화의 허벅지처럼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나는 갯바람 쐬러 휑 나와버렸다. 억새풀들이 달빛을 부여안고 우우 흔들리고 있었다. 웬일일까. 천수만 염전까지 따라 온 민수의 그림자가 미루나무보다 더 커다랗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시인이 되면 내가 밀가루 반죽 때리는 짜장면집에 놀러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허리끈만 만지작거리며 갯바람을 쐬는 중이었다. 초록빛 바다가 꽁꽁 얼고 있었다.
울지 말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 속에서 더 단단해지는 조약돌이 되고 싶었다. 개나리 울타리 밑으로 민들레 새순들이 뽀드득뽀드득 굳은 땅을 헤집고 있었다. 내일부터 우리는 6학년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