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문학평론가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다고 시인이 말씀했다. 꽃피는 아침은 더 짙게 살고 싶어지기도 할까. 국화축제 한창인 시절이다. 색색의 꽃 화분이 놓이고, 동물 모양의 틀마다 꽃송이들이 가득하고, 꿀벌 잉잉대고, 바람결에 날리는 꽃향기 안으로 들어가는 몽환적 설레임. 초대의 글에 ‘국화 향내 가득한’이라는 구절이 상투적으로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 행사마다 나름 멋을 부려 몇 개의 상투적 표현들을 돌려쓰다니 실은 얼마나 천진한 시대의 유행이었던가.
이 무렵 새 책은 꽃축제를 함께 보자는 초대처럼 설렌다. 이야기 축제의 개막이기 때문. 박희팔 작가가 대하소설의 첫 번째 책 『박희팔 대하소설 1, 출계 응분이』를 출간했다. 작가는 한국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엽편소설, 장편소설에서 수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엽편(葉篇)은 나뭇잎 한 장에 적을 수 있을 만큼 짧다는 데서 유래했지만 기승전결을 갖춰야 한다. 극적 반전을 중시하는 꽁트와 달리 과녁을 맞추듯 정곡을 향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손바닥 만한 소설이라는 뜻에서 장편(掌篇)이라고도 부른다. 여간한 내공이 아니라면 A4 한 장 남짓한 분량 안에 기승전결을 다 담아내기는 어렵다. 짧은 이야기마다 잘 빚은 항아리처럼 유연하게도 조율해 내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 엽편 소설들에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사람의 사는 일들을 이야기해왔다.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그 짧은 이야기 속에서 저마다 울고 웃게 만드는 건 엄청난 일이다.
박희팔 작가는 대하소설에서도 역시나 할 이야기가 많다. 긴 소설을 쓸 때도 이야깃거리가 마를 일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쓸 얘기가 넘쳐나 한 이야기를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하도록 다른 이야기가 샘솟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에서 참고한 문헌의 전문이 실리기도 하고 각주로 넣었으면 싶은 내용들을 그대로 본문에 삽입하기도 한다. 정통의 소설 독법으로는 갑자기 달라진 문체나 연구서 부분들을 그대로 읽자면 난감하고 놀랍다. 소설 장르의 이탈이거나 장르확장이라고 할지, 아니면 아예 장르초월일지. 포석 조명희 선생의 글을 전문 그대로 삽입한 부분은 단순 인용이라기에는 길고, 필연성을 따지자면 되게 용감하다. 일제 강점기의 천재 작가인 포석, 불행한 시기의 선배작가에 대한 천진한 오마주의 순정함으로 보아야 할지.
작중 세계는 도저하다. 인물들은 어려움에 놓여도 되바라지지 않고 웅숭깊다. 어긋남은 있어도 거대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낭만적이도 하다. 시대 명분이나 시절의 어려움이 배경에 놓여있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에도 거스르지 않고 인물마다 제힘을 다해 헤쳐가려는 순연한 세계이다. 개인은 한 시대의 견고한 관습과 명분 앞에서 갈등하고 절망하거나 무력감에 빠질 틈도 없이 삶의 무게를 허위허위 감당해 낸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버텨내야 할 관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가족 관계는 인물이 부조리한 삶을 지탱하는 짐이기도 힘이기도 하다.
박희팔 작가의 소설은 묘사보다 설명의 방식이 주를 이룬다. 그 이야기 방식은 민담이나 전설의 전통적 이야기 방식과 닿아있다. 홀로 고립된 개인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로 함께 흘러가는 이야기이다. 할 얘기 넘치는 작가, 이야기 잘 만드는 거야 이미 일가를 이룬 터이지만 구불구불 풀어놓는 이야기의 등성이에 오르면 한 시인의 말씀처럼 눈물이 날만큼 순정하고 웃음기 번지는 익살이 앉아 쉬어 갈 만한 바윗고개 언덕처럼 기다리고 있어 눙치는 것으로도 읽힌다. 흥미롭게도 박희팔 작가의 소설세계와 송창식의 노래 ‘에이야 홍 술래잡기’는 순정하다. 심술내지 않고 제 할 역할을 하는 세계를 심각하지 않게 말하는 부분도 닮아 있다.
‘술래하는 사람들 샛눈 뜨기 없기/꼭지하는 사람들 멀리가기 없기//...먼저 찾은 사람들 놀려대기 없기/들켜버린 사람들 떼부리기 없기/에이야 홍 에이야홍/약속대로 약속대로 처음에 정한대로/가위바위보로 나온대로 꼭꼭 꼭꼭 꼭꼭/술레하는 사람들 앉아쉬기 없기/꼭지하는 사람들 아주 가기 없기//.앞에 가는 사람들 먼지내기 없기/ 뒤에오는 사람들 딴지 걸기 없기/...먼저 닿은 사람들 핀잔주기 없기/뒤에 처진 사람들 심술내기 없기/... 에이야 홍 에이야홍/약속대로 약속대로 애초에 정한대로/날 때꾸던 그 꿈대로 꼭꼭 꼭꼭 꼭꼭/ 앞에 가는 사람들 발돌리기 없기/뒤에 오는 사람들 앞지르기 없기/에이야 홍 에이야홍’
박희팔 작가 슨상님, 대하소설 2,3,4,5도 뒤이어 출간하시는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