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1806년 실질적으로는 독일의 군주였으나 명목상으로는 유럽의 황제인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의 권위 앞에 무너졌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프랑스황제로 내 세운 후, 프란츠 2세를 오스트리아의 황제 등의 신성로마가 아닌 이외의 이름으로 살게 했다. 서기 800년 칼 대제가 로마의 황제라는 명칭으로 등장함으로써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명명된 “신성로마제국”은 이로써 해체되었다.
13세기는 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은 실권이 없는 명칭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의지해서 정치적 권력이 크지 않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실질적인 힘은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選帝侯)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황제라는 명칭이 가져다 주는 주요 가문들과의 결혼 가능성마저 배제하지는 못했다. 합스부르크는 그들의 고향인 스위스를 떠나 오스트리아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그들은 남들이 전쟁을 통해 수고롭게 국토를 넓히는 동안 결혼을 통해 제국을 확대해 나갔다. 아들이 없는 가문의 딸과 결혼한 경우, 재산소유권이 남자에게만 있던 게르만족의 전통에 따라 사위가 장인의 재산과 명칭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스페인 합스부르크’라는 명칭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황제인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립이 카스티야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함으로 생겼다. 그들의 장남은 제국의 황제로써는 ‘칼5세’로, 스페인 왕으로써는 ‘칼 1세’로 등극하여 황제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속받고, 스페인 왕으로써는 ‘뜨라스따마라’가문을 상속받았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이 동시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놓이자, 이들 사이에 끼어버린 프랑스는 고민과 고통 속에 한 참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문이 유전병으로 칼 2세에서 대(代)가 끊기자 왕좌는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가(家)와 프랑스의 부르봉가(家) 사이의 싸움의 빌미가 되었다.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다.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한 대가로 많은 영토를 빼앗기면서도 스페인의 왕가만은 지켜 낸 이유가 다시는 독일이 지배하는 두 나라 사이에 끼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위트레흐트조약과 이후의 부속조약들에 의거하여 부르봉가문의 루이14세의 손자 필립이 1724년부터 스페인을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그러나 1833년 페르난도 7세가 아들 없이 서거함에 이르러 부르봉가문 역시 대(代)가 끊기는 사태를 목격한다. 국왕은 자신이 죽기 전 게르만의 살리카(Salica)법을 개정하여 여자도 상속인이 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이제 3살에 불과한 딸 ‘이사벨 2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보수귀족과 군부는 이에 저항하며 살리카 법에 의하면 왕으로 등극했어야 할 페르난도7세의 동생 카를로스를 지지한다. 이렇게 발생한 것이 ‘카를로스파(派) 전쟁’이다. 카를로스파는 이사벨파에게 1,2차 전쟁을 모두 패하여 이사벨의 복위를 방관할 수 밖에 없었으나 1868년 군부의 쿠데타로 이사벨2세를 다시 쫓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3차 전쟁에서 종국적 승리를 거둔다.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진 후의 독일은 브란덴부르크를 이은 프러시아를 통치하던 호엔촐레른가문의 주도아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신정부가 1년여의 고충을 덜고 선택한 새로운 왕은 바로 호엔촐레른가의 레오폴드였다. 다시 독일가문 사이에 끼일 운명에 처한 프랑스는 당시의 집권자이던 나폴레옹3세를 위시하여 프러시아에 강력한 반발을 토해 내었다. 독일은 프러시아의 왕 빌헬름을 황제로 추대하여 통일을 이루려 할 때였고 프러시아의 수상은 ‘철의 재상’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였다. 프러시아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입김을 제거해야 함을 알고 있었고 그 수단은 전쟁이었다. ‘보불전쟁’이 서서히 그 서막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빌헬름1세는 1870년 온천으로 유명한 라인란트팔츠주의 엠스(Bad Ems)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미 레오폴드의 스페인 왕위계승 철회를 확답 받았지만 이의 공식문서화를 종용하기 위해 엠스로 대사를 파견하였다. 불쾌해진 프러시아의 왕은 이 사실을 비스마르크에게 내부 전보망을 통해 전했고 비스마르크는 이를 프랑스와의 전쟁의 불씨로 만들었다. 바로 ‘엠스전보사건’이다.
보불전쟁의 결과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고, 프랑스는 제3공화국이란 힘든 여정을 겪게 되었으며, 스페인은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로 왕정복고를 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지는 부르봉왕가를 재건했다.
보불전쟁이 일어나게 된 과정을 간단히 서술하는데 만도 많은 용어와 이를 둘러 싼 역사적 사실이 요구된다. 이것을 쉽게 만드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호기심의 몸짓을 기반으로 자신의 클래스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아이들을 길러 내는 것이다. 그것이 교육과정이고 이를 지향하는 방법이 교육개혁이다. 나이로 수준과 이해력과 과목과 진도를 정해놓은 뒤 아이들에게 이를 강요하는 것은 온통 진정한 교육에 어긋나는 짓이다.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시작하여 모든 것을 끌어 내는 일을 교육이라고 명명할 날이 오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