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김미나 기자]‘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베이스’, ‘오페라 무대의 빛나는 보석’, ‘작은 거인’, ‘최고의 바그너 가수’…. 베이스 연광철 성악가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이다.
충주공고와 청주대 음대를 나와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 베이스 연광철(56·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성악가가 오랜만에 고향 충북을 찾는다.
동양일보 창사 30주년 기념 연광철 초청 독창회가 오는 11월 14일(일) 오후 4시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세계 무대를 누비는 최고의 베이스
고향인 충북보다 서울에서, 모국인 대한민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연 성악가는 전 세계 무대에서 클래식 팬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국립 오페라, 파리 국립오페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 밀라노 라 스칼라, 런던 코벤트 가든 등 오페라 가수들의 꿈의 무대에 일상적으로 초청받는 세계 최고의 베이스다.
‘비행기가 곧 집’이라며 농담을 건넬 만큼 바쁜 일정 가운데도 연 성악가는 동양일보 초청 공연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오랜만에 고향인 충북에서 공연하게 돼 설렌다”며 “이번 공연은 한국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연 성악가는 동양인이 쉽게 낼 수 없는 중후한 힘과 깊이, 따뜻한 음성을 갖고 있다. 171cm의 작은 키로 어느 무대가 됐든 명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졌다. 유럽에서는 그를 ‘덩치는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존재감’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199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부터 10년간 베를린 국립오페라의 전속 솔로리스트로 활동하다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로부터 초청이 많아지면서 2004년 독립했다.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돈 카를로’, 바그너의 ‘파르지팔’·‘로엔그린’·‘니벨룽의 반지’, 샤를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 코로나19가 시작되기 불과 몇 년 전까지 대형 오페라에서 주요 배역을 맡으며 세계 무대를 누볐다.
특히 그는 바그너 전문 가수로 유명하다. 1996년부터 작곡가 바그너 음악의 성지로 불리는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100회 넘게 공연했다. 바그너 오페라는 독일어의 뉘앙스를 잘 살려야 하는 특징 때문에 동양인들에게 문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고난 음색과 철두철미한 노력으로 연 성악가는 바그너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 기량을 가진 베이스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독일의 궁정가수 호암상 수상하다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세계 무대를 누비던 그는 2018년 독일 베를린 국립국장(슈타츠오퍼)에서 궁정가수를 뜻하는 ‘캄머쟁어’ 칭호를 받으며 그 진가를 입증했다. ‘캄머쟁어’는 우리나라의 ‘무형문화재’와 비견할 수 있는 칭호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이 받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2007년 무용계에서 강수진 무용수가 받아 국내에 처음 소개됐던 '캄머탠저린(궁중무용수)'과 같은 칭호다.
2018년에 그는 국내에서 호암상을 받는 겹경사도 맞았다. 호암상은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자신의 호 ‘호암’을 따서 만든 호암재단에서 재정한 상으로 상금이 무려 3억원이다. 연 성악가는 예술상 부문의 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대중적으로는 1996년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와의 내한 공연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당시 함께 공연했던 도밍고는 연 성악가를 ‘세계 오페라 무대의 떠오르는 보석’이라고 극찬했다. 그때 처음 만난 도밍고와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함께 녹음하기도 했다.
●농부의 아들이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기까지
세계적인 성악가로 우뚝 서 있는 연 성악가가 어린어린 시절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한 번도 받아 본 적다는 이야기는 늘 화제거리다.
농사 짓는 부모님과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전무했던 그는 충주 충일중 시절 음악 시간에 독일 가곡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는 지난 3월 동양일보를 방문했을 당시 “당시 카세트플레이어도 없는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 레코드샵에서 독일 가곡을 들었다”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집안에 도움이 되기 위해 충주공고에 진학했지만 2학년 때 교내음악경연대회에서 가곡 '선구자'를 불러 1등을 해 뜻밖의 재능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취업 대신 피아노 학원에서 노래를 몇 달 만에 속성으로 배우며 입시 준비를 한 끝에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진학했고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준 주완순 교수를 만났다.
이후 날개를 단 듯 각종 콩크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 음악콩쿠르, 음협콩쿠르, 동아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충북에서는 충북오페라단의 ‘베르테르’로 데뷔했다.
졸업 후 음악교사를 꿈꾸기도 했지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유학길에 올랐다.
청주대 시절부터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단돈 700달러를 손에 쥐고 혈혈단신 1990년 불가리아 소피아음대로 유학을 떠났고 1992년엔 베를린 국립음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1994년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단에 입단하며 성악가로서의 전기를 맞게 됐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던 그는 2010년 서울대 음대 교수에 임용됐다. 당시 공고와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크게 화제가 됐다. 지역에서는 그를 교수로 초빙하지 못했다는 아쉬운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7년 만에 그는 서울대 교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그는 “무대가 늘 그리웠다”며 “당시 부모님께서는 서운해 하셨지만 오직 베이스 성악가로의 삶을 아내가 응원해줘 용기를 냈다”고 웃어보였다.
그의 목표는 앞으로 10년은 더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다. 가족으로 아내 박진하(53) 씨와 27세인 쌍둥이 딸들이 있다.
동양인의 한계를 넘어 세계 무대를 점령한 연 성악가. 그의 명품 공연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청주에서 펼쳐진다.
김미나 기자 kmn@dy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