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일보]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육거리 시장 골목 구석진 한쪽,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국수를 써는 할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를 댄 듯 간격이 똑 고른 국수 가닥에 노인의 오랜 경력이 묻어났다. 이마엔 세월이 새긴 잔물결 위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고여있다. 국수를 써는 손길은 노련했지만, 힘이 달리는 듯 가끔 긴 한숨을 토해내 내 마음이 짠했다. 검버섯이 듬성듬성 솟은 두툼한 손등엔 고단한 세월의 더께가 얹혀있다. 저 손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키워냈을 것이다. 내 나이에 견주어 80 고개를 넘어선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7.10 15:05
-
[동양일보]싱싱한 신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바람의 부채질에 서로를 간질이며 웃고 있는 푸른 계절이다. 맑은 심성을 가진 자에게 주고 싶은 바람의 선물이 그린 최고의 작품이다. 바람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공기는 또 어떤가? 어떤 사람이 병원에서 공기를 돈으로 계산하여 지불하고 보니, 그 동안 내가 마신 공짜 공기 값이 얼마인지 계산하고 깜짝 놀랬다는 말이 생각난다. 공기의 값을 돈으로 계산하고 보니 공기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더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늘 가까이에서 공기처럼 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러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7.07 17:58
-
[동양일보]수년 전 영화‘라라랜드’를 보았다. 가슴이 아려서 한 동안 멍하게 살았다. 주인공 남녀는 가지 있던 것이 많지 않아도 지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도전하면 살아낸다. 이루고자 하는 꿈으로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두 사람은 공유한다. 각자의 꿈을 위해 치열하게 살던 연인은 사랑과 꿈 사이에서 갈등이 커지자 아쉽게도 각자 꿈을 선택한다. 유명 배우로 한 가정의 엄마로 꿈을 이룬 미아는 어느 날 저녁 남편과 외식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한 재즈 바에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옛사랑을 마주한다. 재즈 연주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7.05 14:59
-
[동양일보]여자 넷이 만났다. 30여 년 이어오던 산악회가 해산되고 나서 결성된 작은 모임이다. 좋은 날 만나 야트막한 산을 오르기도 하고 전망 좋은 둘레길을 걷기도 한다. 자박자박 걸으며 이야깃거리를 푸는 것도 재밌다. 삐릿 삐릿 파랑새 소리가 청량하다. 자줏빛 싸리나무꽃에 바투 다가가 눈 맞추고 큼큼거리니 오감이 열린다. 희뿌연 회색빛 도시에서 한나절 동안 해방이다. K가 그간 있었던 일을 남에 이야기하듯 말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예쁜 꽃을 봐도 시들하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봐도 무심해요. 밥을 안 먹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7.03 18:29
-
[동양일보]4개월째 매주 월요일이면 서울에 있는 통증의학과에 치료를 받으러 다닌다.의사의 말로는 등 근육이 없고 인대가 약해서라는 진단을 준다.근육은 운동과 노력으로 생길 수 있지만 인대는 자연생성이 안된다며 인대강화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시작한 병원 나들이, 어깨 죽 지부터 아래로는 엉덩이까지 프롤로 주사를 맞고 나오면 정작 허리와 등의 아픔보다 주사 놓은 자리가 더 아프다.얼음찜질을 하고 누워 있어도 연 사흘은 겨우 밥이나 끓여먹고 엉금엉금 기어서 눕곤 한다.통증이 가라앉을 때쯤이면 다시 서울로 가는 길, 등이 너무 아파 버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26 14:51
-
[동양일보]충주시 중앙탑면에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비가 있다.코로나19로 인해 일시 중단되고 있지만, 충주문화원은 매년 시민을 대상으로 중국에 있는 고구려유적답사를 진행하고 있다.몇 년 전 유적답사단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답사지역은 심양과 요양, 환인, 집안, 통화였고 방문지역 모두 의미와 역사성이 있지만 그중 기억에 오래 남는 곳이 있다.처음 찾은 곳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회백색 석회암으로 태자하 절벽을 이용해 쌓은 고구려산성 백암성이었다.올라가는 도중 만난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도 전혀 낯설지 않은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23 16:09
-
[동양일보]부모님 돌아가신 후, 친정집 구옥舊屋과 텃밭을 가꿔오고 있다. 칠순이 넘어서까지 농사 외길을 고집하셨던 아버님과, 굽은 등 펼 날 없이 일하셨던 어머님 덕분으로, 우리 칠남매는 1960년대 보릿고개도 그럭저럭 큰 배고픔 없이 잘 지났다. 아버님은 농사일과 땅에 대하여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그 이상으로 경외심을 갖고 땅 한쪽 벼 포기 하나하나를 당신의 살점이요 자식처럼 보살피셨다. 어린 나는 그런 아버지가 하늘처럼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늘 흙투성이 잠방이에 밀짚모자를 쓴 아버지를 다림질 잘된 양복바지에 하얀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15 15:37
-
[동양일보]2018년 여름 직장에서 퇴직했다. 그런 이후 차령산맥 기슭에 조그만 밭을 마련해 자잘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이름을 부채밭이라고 지었다. 요즈음에는 날이 너무 가물어 지하수를 퍼 올려 밭에 물을 주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이다. 자연의 도움이 없으니 올해 농사는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지하수를 퍼 올려 작물들에게 물을 주는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지나친 가뭄 때문에 감자도 제대로 크지 못하고, 고추도 제대로 크지 못하고, 토마토도 제대로 크지 못한다. 상추농사도 고라니들이 너무 좋아해 엉망진창이다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12 19:14
-
[동양일보]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하다. 입안에서 천천히 휘몰아 칠 때 저절로 미소가 번지고 오감이 작동한다. 하지만 영혼을 흔들 만큼 기억에 남는 음식은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먹는 음식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음식을 생각하면 그 당시의 상황과 추억이 떠 올라야한다. 일찍부터 혼밥을 즐기던 20대엔 속상한 일이 있거나 머리가 복잡하면 매운 짭뽕을 먹으면서 훌훌 털어 버리고 힘든 일이 별게 아니라며 새 힘을 얻었다. 또 언젠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저녁 식사로 나온 소고기배추된장국이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12 14:58
-
[동양일보]수도원에서 40일 작정 기도를 했다. 그러나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한 수도자가 몰래 수프 한 국자를 떠먹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 이 수도자를 비난하며 정죄한다. 프란체스코가 말한다. ‘우리가 금식함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로를 사랑하며 배려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인데 설령 그중 하나가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그를 비난하는 것이 옳은가?’라며 자신도 40일이 되기 전 수프 한 국자를 떠먹고 비난의 대상이 된 수도자를 위로하고, 동시에 비난보다는 감싸는 사랑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우리는 살면서 이런 오류를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09 18:01
-
[동양일보]온통 하얀 꽃 잔치다. 무심천변에 조팝나무꽃이 만발하더니 거리엔 이팝나무꽃이 흐드러졌다. 뒷산에도 아카시꽃으로 하얗다. 계절의 여왕이 순백으로 치장하고 떠날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아침나절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마음에 점 하나 찍자는 점심에는 국수가 제격이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 “국수나 해 먹자.”라고 하셨지만 난 국수가 좋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멸치 국물에 말은 잔치국수는 말할 것도 없고, 추운 겨울 따끈한 바지락국물과 어우러진 칼국수도 놓치면 서운하다. 더운 여름 걸쭉한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07 15:32
-
[동양일보] 혼자 사는 집은 늘 적막하다. 침묵만이 시간과 긴 싸움을 한다. 침묵이 시간과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면 나는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눈의 피로가 극에 달하면 조용히 눈을 감고 사색을 즐긴다. 온몸을 감싸며 무섭게 밀려오는 적막감은 두려움이 되기도 하고 때로 눈물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처지는 감정을 막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고 그 소리가 집안에 울리도록 한다. 그날도 혼자 떠들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마음을 적셨다. 반짝이는 별빛아래 소곤소곤 소근 대던 그날 밤~ 하고 시작하는 노래는 무너진 사랑 탑 이라는 오래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6.02 18:32
-
[동양일보]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외로움이란 짐을 견디는 무게일지 모른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이름이 하나씩 사라져가고, 동생들도 먼저 떠나 주변에 또래가 별로 없는 외로움을 올해 92세이신 아버지를 곁에서 보면서 실감하게 된다. 출퇴근 거리가 1시간 이상 되다 보니 피로도가 심하여, 30분 남짓 거리의 친정에서 다니고 있다. 친정에는 아버지께서 혼자 사신다. 어머니가 2010년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아버지는 주방에 처음 발을 디디셨다. 육 남매가 주말마다 돌아가며 들러서 반찬을 만들어 놓고 국을 끓여 놓으면 아버지가 밥을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5.31 15:10
-
[동양일보]햇살이 곱다. 봄 산이 청정하다. 눈바람을 맞으며 모진 고독을 견뎌낸 검푸른 나목들 위에 돋아나기 시작한 여린 잎들의 수런대는 소리로 가득하다. 물오른 산 벚나무도 봄이 부르는 소리에 화답하며 꽃을 피웠다. 텅 비어 허허로웠던 산야가 부드럽고 여린 색을 입어 오색구름으로 피어나는 중이다. 생명이 움트면서 토해내는 소리 들이 잠자는 심령들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봄의 품성은 어떤 것일까. 봄은 바람을 데리고 빛으로 온다. 봄의 빛깔은 찬란하다 못해 영롱하다. 단단한 것들을 헐겁게 하고 닫혔던 빗장을 열게 한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5.29 15:24
-
[동양일보]유난히 뜨거웠던 지난여름 어느 날, 지인을 따라 서산 다육이 농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처음 본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제각각 이름표를 달고 나를 맞았다. 아기 손톱만큼 작은 잎부터 제법 커다란 잎사귀까지 저마다 태양을 향해 뜨거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일반 식물과는 달리 다육이는 햇빛에 달달 볶아야 한다. 더이상 목마름에 견딜 수 없어 제 몸에 달린 잎사귀의 수분을 짜내어 생을 이어가게 만들어야 비로써 명품 다육이가 탄생한다. 동글동글한 잎에 한가득 복이 들어있을 듯한 방울복랑, 동화책 속의 마법사같이 신비로운 보랏빛을 자랑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5.26 16:02
-
[동양일보]고향 집 마당 가에는 복스럽게 자란 댑싸리가 빈자리를 찾아서 사열 하듯 줄지어 서 있다.굳이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어디서 날아왔는지 틈새를 찾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연록의 무성한 잎으로 적당히 살이 오른 통통한 아이처럼 잘도 자라고 있다.어릴 적 마당 쓰는 일이 싫었지만, 가끔 마당을 쓸 때마다 동전을 한닢 씩 줍는 재미에 일찍 일어나 그 넓은 마당을 쓰느라 땀을 쏟았던 적이 있다. 아버지가 일부러 떨어뜨려 놓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안 일이지만….지금은 댑싸리비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5.24 15:27
-
[동양일보]모모는 우리 사무실 고양이 이름이다.1년 전 어느 공장 부근에 버려진 어린 고양이를 데려다 키우시던 분이 막 사료를 먹기 시작할 무렵 우리한테 입양을 해 주셨다.모모라는 이름도 직원들이 지어 주었는데 부르면 곧잘 알아 듣는다.얼굴이 예쁜 치즈 양이로 하는 짓도 귀여워 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회사의 마스코트로 성장 해 왔다. 가정집도 아니고 회사 사무실에무슨 고양이냐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지만 그 효과는 의외로 크다.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직원들에게는 낮 동안에도 대리 만족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업무 스트레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5.19 15:17
-
[동양일보]백 세 되신 시아버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5월엔 명절이 많으니 가족들과 잘 지내라 하신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을 명절이라 하신 모양이다. 명절이라니, 난 생각지도 못한 멋진 말씀이다. 며칠 전 친정아버지 산소 벌초를 하고 1박 2일 가족모임을 했다. 친정에 가면 네 가족이 모인다. 멀리 미국과 중국에 있는 가족과 특별한 상황에 놓인 가족을 제외하고 가능한 가족들은 모두 모인다. 두어 시간 걸려 숙소에 도착하여 방을 정해주고 여장을 풀었다.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해변으로 나갔다. 아이들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5.15 19:31
-
[동양일보]분명 봄은 왔는데 아직도 춥다. 만뢰산 자락의 봄 풍경이 곱다. 봄꽃들이 다투며 피고 아직도 코로나가 숨어서 엿보고 있어도 꽃들은 피고 있다. 아무곳에서나 사진을 찍어도 배경이 아름다운 연두빛 계절. 눈 깜짝할 새 벚꽃이 떠나가고 새소리와 물소리가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니 다시한번 사랑에 빠져 보고 싶은 봄날이다.산길을 따라 서 있는 버들강아지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이렇듯 봄은 사람들을 갇힌 곳에서 대자연으로 불러내는 힘이 있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가로수 회양목 잎새에 푸른빛이 돌고, 여린 풀들은 땅위를 밀고 올
동양에세이
동양일보
2022.05.08 15:59
-
[동양일보 엄재천 기자]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따스한 바람이 들창을 두들겨 부스스 눈을 뜬다. 긴 겨울에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그러기를 몇 날 며칠 산책길에는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이 하루가 다르게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니 정령 봄이다.지금은 봄의 한복판, 봄의 꽃들이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이상기온으로 수은주는 봄과 여름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야트막한 산을 접한 들녘에서는 농부들이 밭갈이와 비닐 씌우기에 여념이 없다. 나의 산책도 뜨거운 한낮을 피해 이른 아침이나 다 늦은 저녁나절에 나서고 그
동양에세이
엄재천
2022.05.03 18:18